중학교 때였을 겁니다.
아버지는 마침 상업은행 부산 대연동 지점에 근무하시고
저는 대연동 소재 대연중학교에 다닐 때였죠.
 
아버지는 괜찮다며 저를 은행 통근버스에 태우곤 하셨습니다.
직원용 차량에 학생이 탔으니
그 내 거북한 마음.
 
어떤 때는 아버지가 저만 태우기도 했습니다.
그럴 때면 주위에 앉은 아저씨들이
'너거 아버지 뭐고, 차장이가?'
'아뇨'
'지점장이가?'
'아뇨'
 
제 아버지는 만년 '안내'였습니다.
전에는 '수위'라고 불렸었죠.
 
결국, 얼마 타다가
어느날 아침, 절 태우는 아버지에게
운전하는 분이 '애를 태우면 안 된다'고 금지시켜서
아버지가 '너무하십니다' 라고 가볍게 항의?하고는
그 다음부터는 일반 버스를 타게 되었습니다.
 
평북 박천 출신이신 아버지는
박천 고등중학교 3학년 때 인민군으로 징집당해
고향과 부모 형제를 떠나 죽음의 전장으로 나가셨고
포탄에 부상을 당하고는 붙잡혀
(귀 밑에 파편이 박혀 귀 밑이 늘 볼록했었습니다)
포로생활을 하다 풀려나 남한에 홀로 정착하셨습니다.
 
아버지의 직업과 직위를 말해야 하는 때마다
부끄러울 것이 없는 것이 늘 부끄러웠던 어린 시절
 
언젠가 문득
내 아이가 학교에서 '네 아빠 뭐하니?'라는 친구들의 질문을 받을 때
내 아이는 어떤 감정을 느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.
그래서 물어 보았습니다.
그런 질문들 하냐고. 한답니다.
 
예상대로, 질문은 이렇게 이어집니다.
병원에서 일하신다.
의사냐?
아니다
간호사냐?
아니다
그럼 뭐냐?
오다리다. (번역; oderly)
오다리가 뭐 하는 거냐?
 
내 아이의 감정을 몸으로 짐작할 수 있었습니다.
 
저도 교회에서나 어디서나 그런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.
오다리 자체를 잘 모르시기에 풀어서 설명합니다.
환자도 옮기고 쓰레기도 치우고 합니다. 하면
에이~ 하기도 하시고, 슬쩍 웃기도 하고 그러시죠.
 
이왕이면 의사였으면 좋았을텐데
변호사라도 괜찮고
사업을 한다 해도 괜찮고.
전문 기술자나
아니면 학력이라도 박사 쯤 되었으면.
 
부끄러울 것 없다와
부끄럽다가 제 속에 공존합니다.